긔미 독립 운동때 아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라. 긔미 삼월 일일 독립선언이 나며 국내,국외 만세소리 서로 연하얏었다. 그 가운데도, 충남 목천 아내 장터일은 가장 장렬한 운동의 하나다. 그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이만 노소남녀 스므분이요 옥에서 궂긴이 한분이니 이 한분이 곧 어린 녀학생 유관순, 열일곱에 이 일을 일으켰다. 음력 삼월 일일은 아우내장이다. 어린 녀학생의 높은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온 장터가 만세속에 들었다. 독립정신 내미는 앞에 총칼이 보이지 아니하니 마츰내 많은 피가 흘렀다. 유관순은 잡히었다. 묶어드는 여러사람을 보더니 소리를 높여 오늘 일은 다 내다. 적이 보니 어린 녀학생이다. 일은 크다. 나는 적다. 온갖 악형을 다하며 누가 한 것을 대라고 하?으나 오즉 내다라고 할 뿐이었다. 그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고 유관순은 끝끝내 굴하지 아니하야 얼마 아니하야 궂기니 잡히던 이듬애 구월이다. 처음 일어나던 날 유씨집 부부보다 먼저 김구응은 그 어머니 최씨와 모자 함께요. 조인원, 김상헌, 서병순, 박상규, 전치관, 한상필, 윤희천, 유중오, 윤태영, 이성하, 박병호, 신을우, 박유복, 박영학, 방치석, 박준규다. 한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분들이니 응해서 일어난 이, 일으킨 사람과 둘이 아니요. 이듬해 옥사가 그 날의 죽음과 다름이 없다. 형제야, 자매야, 선렬들 의 피빛이 아즉것 새롭다. 이 좌최를 돌에도 사기거니와 서로들 마음에 사기라.
대한민국 이십구년 십월
뎡인보는 짓고 김충현은 쓰다.
유관순기념사업회 세움.
※ 위 기념비문은 민족사학자이신 위당 정인보(1893~ ?)선생이 지었고 기념비는 1947년에 제작되었다. 표기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한글표기를 따랐다. 아래의 글은 당시의 한글표기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되 현재까지 밝혀진 유관순열사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수정하였다. 더불어 현재의 한글 맞춤법을 고려했으며 오타 등도 수정하여 이해를 도왔다. 현 지명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는 1914년 이전에는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였으며 1919년에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이다.
기미 독립 운동때 아우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취라. 기미 삼월 일일 독립선언이 나며 국내,국외 만세소리 서로 연하였다. 그 가운데에도,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일은 가장 장렬한 운동의 하나다. 그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이만 노소남녀 스무분이요. 옥에서 궂긴이 한분이니 이 한분이 곧 어린 여학생 유관순, 열일곱에 이 일을 일으켰다. 음력 삼월 일일은 아우내장이다. 어린 여학생의 높은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온 장터가 만세속에 들었다. 독립정신 내미는 앞에 총칼이 보이지 아니하니 마침내 많은 피가 흘렀다. 유관순은 잡히었다. 묶어드는 여러 사람을 보더니 소리를 높여 오늘 일은 다 내다. 적이 보니 어린 여학생이다. 일은 크다. 나는 적다. 온갖 악형을 다하며 누가 한 것을 대라고 하였으나 오즉 내다라고 할 뿐이었다. 그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고 유관순은 끝끝내 굴하지 아니하야 얼마 아니하야 궂기니 잡히던 이듬해 구월이다. 처음 일어나던 날 유씨집 부부보다 먼저 김구응은 그 어머니 최씨와 모자 함께요. 조인원, 김상헌, 서병순, 박상규, 전치관, 한상필, 윤희천, 유중오, 윤태영, 이성하, 박병호, 신을우, 박유복, 박영학, 방치석, 박준규다. 한날 적의 총칼에 넘어진 분들이니 응해서 일어난 이, 일으킨 사람과 둘이 아니요. 이듬해 옥사가 그 날의 죽음과 다름이 없다. 형제야, 자매야, 선렬들의 피빛이 아직까지 새롭다. 이 자취를 돌에도 새기거니와 서로들 마음에 새기라.
대한민국 이십구년 십월
정인보는 짓고 김충현은 쓰다.
유관순기념사업회 세움.